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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ht life

🧚죽은 자가 산 자를 도울 수 있을까? 한강작가 시 모음-어느 늦은 저녁 나는, 회복기의 노래, 서시 등..

by 배움키움 2025.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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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받고 싶다.
힘을 내고 싶다.
아니 도움을 받았으니 더욱 힘을 내야겠다.
우리 문학의 자랑, 한강이여 영원히 흘러라를 되뇌며 노벨문학상의 감동과 함께 한강의 시를 읽어본다.

🎉누구나 아는 한강작가 미니소개
1970년 대한민국의 광주에서 태어나 9살 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저명한 소설가”라고 밝혔다. 노벨위원회는 그를 국제적으로 알린 ‘채식주의자’(창비, 2007)와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 지성사, 2010) ‘희랍어 시간’(문학 동네, 2011), ‘소년이 온다’(창비, 2014), ‘작별하지 않는다’(문학 동네, 2021), ‘한 강’(문학 동네, 2022) 등 20건의 작품을 소개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파란 돌  


                한강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은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회복기의 노래

             한강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어느 날, 나의 살은
    
                     한강

어느 날 눈떠보면

물과 같았다가

그다음 날 눈떠보면 담벼락이었다가 오래된

콘크리트 내벽이었다가

먼지 날리는 봄 버스 정류장에

쪼그려 앉아 트할 때는 누더기

침걸레였다가

들지 않는 주머니칼의

속날이었다가

돌아와 눕는 밤마다는 알알이

거품 뒤집어슨

진통제 糖衣였다가

어느 날 눈떠보면 다시 물이 되어

삶이여 다시 내 혈관 속으로

흘러 돌아오다가




저녁의 소묘

             한강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서    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괜찮아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 질 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 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젠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서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이렇게 멎는다

기억이

예감이

나침반이

내가

나라는 것도



스며오는 것

번져오는 것

만져지는 물결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의 피



어둠과 빛

사이



어떤 소리도

광선도 닿지 않는

심해의 밤

천년 전에 폭발한

성운 곁의

오랜 저녁



스며오르는 것

번져 오르는 것

피투성이 밤을

머금고도 떠오르는 것



방금

벼락 치는 구름을

통과한 새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 영혼의 피





마크 로스코와 나 1

한강

- 2월의 죽음



미리 밝혀둘 것도 없이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는 1903년 9월 25일에 태어나

1970년 2월 25일에 죽었고

나는 1970년 11월 27일에 태어나

아직 살아 있다



그의 죽음과 내 출생 사이에 그어진

9개월여의 시간을

다만

가끔 생각한다



작업실에 딸린 부엌에서

그가 양쪽 손목을 칼로 긋던 새벽

의 며칠 안팎에

내 부모는 몸을 섞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점 생명이

따뜻한 자궁에 맺혔을 것이다



늦겨울 뉴욕의 묘지에서

그의 몸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신기한 일이 아니라

쓸쓸한 일



나는 아직 심장도 뛰지 않는

점 하나로

언어를 모르고

빛도 모르고

눈물도 모르며

연붉은 자궁 속에

맺혀 있었을 것이다



죽음과 생명 사이

벌어진 틈 같은 2월이

버티고

버텨 마침내 아물어갈 무렵



반 녹아 더 차가운 흙 속

그의 손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거울 저편의 겨울  


한강


흰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눈먼 남자 둘이서

앞뒤로 나란히

구두와 지팡이의 리듬에 맞춰 걷고 있었다



앞의 남자가

더듬더듬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의 남자는 앞의 남자의 등을

보호하듯 팔로 감싸며 따라 들어갔다



미소 띤 얼굴로

유리문을 닫았다







어느 날, 나의 살은


한강



어느 날 눈떠보면

물과 같았다가

그다음 날 눈떠보면 담벼락이었다가 오래된

콘크리트 내벽이었다가

먼지 날리는 봄 버스 정류장에

쪼그려 앉아 트할 때는 누더기

침걸레였다가

들지 않는 주머니칼의

속날이었다가

돌아와 눕는 밤마다는 알알이

거품 뒤집어슨

진통제 糖衣였다가

어느 날 눈떠보면 다시 물이 되어

삶이여 다시 내 혈관 속으로

흘러 돌아오다가






저녁의 소묘

한강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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